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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을 남김없이 기록하다-명대 후기 문화인 왕세정과 그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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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명대 중요한 역사가이자 문학가인 왕세정(王世貞)은 수없이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왕세정은 예술과 문화 활동을 매우 좋아하여 당시 모든 문화 영역에 거의 다 참여하였습니다. 더욱 특별한 점은 왕세정이 16세기 명나라의 번영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본 전시는 왕세정의 다채로운 일생과 그의 업적을 통하여 명대 후기의 문화적 번영을 살펴보고 당시 창의력이 충만하고 다양하게 경쟁했던 문화 생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왕세정이란 역사가의 눈을 통해 번영 아래 문화적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일찍이 뜻을 이룬 왕세정(1526-1590)은 22세에 진사시험에 합격을 하였으나 34세 때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됩니다. 부친 왕여(王忬, 1507-1560)가 모함을 당한 후 그는 정치권을 벗어나 이후 많은 시간을 고향에서 지내며 저술, 여행, 사교, 감상 등의 활동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는 적지 않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었고 정원 설계, 서화, 고서, 도자, 자수에서 진귀한 완상품까지 모두 깊이 있게 섭렵하였습니다.

20년간 문단을 주도했던 왕세정은 진나라와 당나라의 서예, 송나라의 그림, 송나라 도자기를 추앙했으며 아울러 그림으로 역사를 증명하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회화사의 다섯번의 변화」라는 개념을 제창하여 양식의 시대 변화를 뚜렷하게 지적하였습니다. 동시대의 예술, 공예창작에 대해서도 왕세정은 많은 평론을 남겼습니다. 서예에 있어서 그는 특별히 「소주(蘇州)지역의 세 명의 대가」를 추앙하였고, 자수를 가짜로 만드는 현상을 판별하였으며, 당대 명대 관요(官窯)의 성행을 잘못이라 평론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가 지닌 날카로운 안목과 속세에 휩쓸리지 않는 견해를 보여줍니다.

당시 지역 간의 경쟁에서 그는 소주와 휘주(徽州), 송강(松江) 등 지역의 신흥 세력을 이끌어 다채롭고 다양한 문화적 겨루기를 진행하였습니다. 풍부한 문학적 재능과 역사관을 지닌 깊이 있는 평론으로 왕세정은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문화적 안목을 인증하는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원의 설계와 종교신앙의 고취, 주목받지 못했던 실경산수를 발굴하고 새로운 풍조인 여행을 기록한 그림 등을 제창하여 새로운 흐름의 유행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은 역사이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사료의 수집과 정리에 전념하였는데 비판의식을 지닌 풍부한 저술은 훗날 《명사(明史)》를 편찬할 때 기초 자료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역사가로서 붓을 통해서 세상의 번영을 다 담고자 하였으며 아울러 이를 통해 부친의 복수를 하였습니다. 예술과 문화 발전에 대한 전면적인 관찰과 깊이 있는 평론으로 그는 후대를 위하여 명나라가 지극히 번성했던 시기의 문화적 번영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녔던 특별한 역사가의 눈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번영 아래 역사와 문화의 맥락을 분석하였습니다.

최근 학계에서 왕세정과 관련한 연구가 굉장히 인기를 얻고 있는데 본원의 풍부한 소장품들은 왕세정의 일생의 업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세정이 어떻게 자신의 천부적 재능과 문화적 자본의 우세함 그리고 역사가로서의 넓은 시야로 후대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견해를 남기고, 각종 문예 활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이를 통해 한 시대의 문화적 풍경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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