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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II(약 100분)

  • 예정관람시간: 약 100분
  • 적합한 관람객 유형: 성인, 학생단체
  • 동선계획설명: 26점의 고궁에서 상설전시 중인 명품을 감상합니다.

|전시작업에 맞추어 전시실이나 전시품은 변동이 있을 수 있으며 현재전시 정보를 기준으로 합니다.현재전시 3F動線圖

청   비취옥 배추
01 청 비취옥 배추

3F|전시실 302|南北故宮 國寶薈萃

이 작품은 실제 배추와 거의 백 퍼센트 비슷한데 비취옥을 다듬어 만들어졌습니다. 하얀 배추줄기와 비취색의 푸른 잎사귀는 모두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하고 가깝게 느끼게 되는 친근한 소재입니다. 배추 잎에 머무르고 있는 두 마리의 곤충도 잊지 말고 보셔야 하는데 이들은 자손이 많은 것을 의미하는 여치와 메뚜기입니다. 이 작품은 본래 자금성의 영화궁(永和宮)에 있던 것으로 영화궁은 광서(光緒)황제의 비인 근비(瑾妃)의 침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취옥 배추가 근비의 혼수로 깨끗함을 상징하고 아울러 자손이 많기를 기원하는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비록 비취옥이라는 재질과 배추 모양은 청중기부터 후기까지 유행하기 시작하였지만 배추와 풀벌레의 소재는 원대부터 명대 초기의 직업화가의 풀벌레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것으로 줄곧 민간에서 환영을 받았던 길상의 소재였습니다. 이외에도 배추과에 속하는 야채는 당대 시인 두보(杜甫)에 의해 정치 환경의 열악함이나 재능이 있는 선비가 뜻을 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 쓰였으며 문인화의 전통에서도 회화의 주제로 인용되어 비슷한 심정을 설명하고 은밀하게 정치하는 자들의 우매함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건륭(乾隆) 40년(1775) 〈화전옥(和闐玉)으로 만든 서리 맞은 소나무를 새긴 화병에 부치는 글〉 이라는 제목의 황제가 쓴 시 중에서 제왕으로서 청 고종은 채소 모양의 화병을 보고 두보의 시에서 정원의 관리가 좋은 채소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비유했던 임금에게 옳지 못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전통을 연상하고 경계함이 있어서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화전에서 나는 옥이 이리 많이 당도하니, 오(吳)지역의 장인은 훌륭한 기술로 딱 맞는 물건을 만들었구나. 옛것을 충실히 본떠 새로운 솜씨를 내니, 풍속에 화려함을 더하는 데 이것이면 가능하리. 잎이 무성하고 뿌리는 둥근 배추는 그 속은 비었으나 겉은 풍성하다. 꽃을 끼워 딱 맞으니 배추 꽃이라. 붉은 복숭아꽃, 하얀 배꽃도 어여쁨에 고개 숙인다. 민간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 색을 두고 아름답다 안하니, 잘못됨을 알려 혹여 이를 두고 넌지시 내게 가르치고자 함인가?」 그러나 이 궁정 공방의 장인이나 비취옥 배추를 만든 옥장인은 모두 창의적이고,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여 후원자의 기호에 맞춰 창작을 한 것이지만 관련 자료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상상의 공간을 남기고 있기도 합니다.

청  고기 모양 돌
02 청 고기 모양 돌

3F|전시실 302|南北故宮 國寶薈萃

옥이나 아름다운 돌과 같은 것 중에 석영 종류인 마노, 벽옥은 특별하고 다양한 무늬와 색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주 조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고기 모양 돌」은 벽옥 종류의 광물로 겹겹이 쌓인 무늬를 가지고 있는데 장인은 그 천연적인 특징에 따라 다시 가공을 하였습니다. 표면에 세밀하게 뚫린 점은 털구멍과 같은 효과를 내면서 또 재질을 비교적 부드럽게 만들어 쉽게 색을 입힐 수 있습니다. 맨 위의 층에 적갈색으로 색을 입혀 마치 고기 껍질이 간장에 적셔졌던 것 같이 보입니다.

산둥 용산문화 후기  옥규(玉圭)
03 산둥 용산문화 후기 옥규(玉圭)

3F|전시실 306|하늘을 경외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다-고궁박물원 소장 옥기 명품전

용산(龍山)문화 시기 사회의 분화가 나날이 뚜렷해 졌으며 통치자만이 옥기를 신분의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습니다. 옥기가 폭이 좁고 긴 것은 「규(圭)」라고 부르고 넓고 큰 것은 「월(鉞)」이라고 부릅니다. 이 얼굴모양 무늬의 규는 노란 회색을 띄며 부드러운 질감으로 라만 스펙트럼에 의해 연옥(nephrite)이라고 감정이 되었습니다. 모양과 장식을 분석한 결과로 보면 용산시기 황하(黃河) 중하류 지역의 옥으로 만든 예기(禮器)로 생각됩니다. 뾰족한 부분을 위로 했을 때 기물의 가운데 부분에 한 면은 구상(具象)으로 되었고 한 면은 추상으로 된 얼굴문양이 낮은 부조로 새겨져 있습니다. 전자는 머리에 「개(介)」자 모양의 관을 쓰고 둥그런 눈에 입을 벌리고 입술 밖으로 긴 이를 드러내고 동그란 귀걸이를 한 얼굴 모양으로 왼쪽과 오른쪽 귀에 각각 측면으로 된 사람 얼굴 모양을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후자는 큰 소용돌이 모양의 눈에 「개(介)」자 모양의 관이 배치되어 있고 좌우로 펼쳐져 두 날개와 같기도 하고 또 쇠뿔처럼 돌출되어 있습니다. 이 옥규는 3000 년 후 궁중에 들어와 건륭(乾隆)황제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 옥규를 위해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단 나무 받침대를 맞추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 나이 38세와 58세때 이를 위한 시 두 수를 짓고 기물의 표면에 새겨 넣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나무 받침대를 만들고 시구절을 새겨 넣은 것이 모두 용산 조상신의 얼굴문양과 서로 반대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근 30, 40년 동안 본원에서는 과학적인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새롭게 청 궁정의 소장품을 조사하여 선사시대 옥기에 대해 전면적이고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창작자의 이념을 존중하기 위해서 이 작품은 전시와 출판시에 뾰족한 부분을 위로 향하는 방식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양저문화 후기  옥종(玉琮)
04 양저문화 후기 옥종(玉琮)

3F|전시실 306|하늘을 경외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다-고궁박물원 소장 옥기 명품전

이 큰 옥종은 아마도 19세기에 청 궁정에 소장되었던 것으로 때문에 기물 표면에 건륭황제의 시가 없이 그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유물은 짙은 청록색에 짙고 옅은 황갈색 반점이 있는 연옥(Nephrite)을 다듬어 만들어졌습니다. 표면에는 처음 옥석을 자를 때의 둥근 곡선 모양의 움푹 들어간 흔적이 있습니다. 길고 네모난 기둥모양의 형태로 약간 위가 크고 아래가 작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중간 구멍을 양쪽 끝에서 대칭으로 뚫었고 접합되는 곳은 고르지 않은 층이 지는 면이 있습니다. 위로 향한 입은 밖으로 벌려져 있고 아래로 향한 입은 비교적 곧게 되어 있습니다. 4개의 네모진 모서리는 작은 눈 문양의 중심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17개의 작은 눈이 있는 얼굴 문양이 새겨져서 이 옥종 위에는 모두 68개의 작은 눈의 얼굴 문양이 있습니다. 양저(良渚)문화 후기에 이르러 양저문화 시기 옥종에 조각된 작은 눈과 큰 눈의 얼굴문양이 조합된 문양이 드물게 보이게 되고 다층의 작은 눈의 얼굴 문양으로 이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경우에 따라 이와 같이 높이가 큰 옥종에서는 위를 향한 입구에 지극히 가볍게 끊겼다 이어졌다 하는 음각선으로 신비한 부호를 새겼습니다. 이 옥종의 위을 향한 입구에는 바로 이러한 부호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가장자리 선 마다 안으로 움푹 들어간 마름모 모양을 띄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한 쪽에는 위가 크고 아래가 작은 기둥을 새기고 아래에 5개의 작은 동그라미가 이어져 있습니다. 그 의미는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신봉했던 「신성한 새」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동한  옥 벽사(辟邪)
05 동한 옥 벽사(辟邪)

3F|전시실 306|하늘을 경외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다-고궁박물원 소장 옥기 명품전

이 옥 벽사는 머리를 들고 우뚝 서있는데 그 기개가 비범한 한대 만들어진 날개가 달린 신령스러운 짐승의 대표작입니다. 네 다리가 달린 맹수의 모습을 하면서 동시에 날개가 있는 형상은 서아시아 지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호랑이 같은 모습에 날개가 달린」것은 무한한 신성과 능력을 대표합니다. 한대에는 이 전통을 계승하여 날개가 달린 상서로운 짐승을 천상 신선계의 상징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한대 예술의 목표는 동감과 긴장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 벽사는 비록 정지하여 서있지만 앞으로 뛰어오르려는 듯한 자세의 역동감이 충만합니다. 사지의 비중이 비교적 크고 둥그렇게 돌출된 면으로 다리 부분의 근육을 표현했으며 전체적으로 직각 삼각형을 이루는 구도는 몸체의 힘이 있는 곡선이나 둥근 면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벽사는 코와 입으로 용맹스럽게 포효하는 듯하여 많은 영웅들을 압도하는 위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 옥으로 된 벽사는 청대까지 전해졌는데 건륭황제는 이를 매우 아껴서 특별히 받침대를 제작하고 가슴과 바닥에 시를 지어 새겨 넣었습니다. 옥의 바탕은 원래 청백색인데 옛것을 좋아하는 풍조에 따라 이전 사람들이 머리와 목, 가슴 등에 적갈색으로 색을 입혀 옛스러운 정취를 더하였습니다.

송 진종 상부원년(祥符元年)  선지옥책(禪地玉冊)
06 송 진종 상부원년(祥符元年) 선지옥책(禪地玉冊)

3F|전시실 306|하늘을 경외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다-고궁박물원 소장 옥기 명품전

옥책은 아름다운 옥을 이용하여 고대에 글을 쓰는데 쓰였던 죽간(竹簡)을 모방하여 만든 옥으로 된 간책(簡冊)입니다. 송대 진종(真宗)이 상부원년(1008) 태산(泰山) 옆의 사수산(社首山, 오늘날 「호리산(蒿里山)」이라 부름)에서 지낸 선례(禪禮)에 쓰였던 옥책과 전체 52장의 옥판으로 그 재질은 모두 곤륜산(崑崙山)에 매장된 것을 채취한 화전(和闐)의 흰색 연옥(nephrite)입니다. 옥책은 모두 16개의 긴 막대로 되어 있으며 아래위 양 끝에 가로방향으로 작은 구멍을 뚫어 금속선으로 연결하였습니다. 정면에는 새긴 후 금을 입힌 228글자가 있는데 내용은 황제가 땅의 신에 제사를 지낼 때 제사 중에 읽었던 제문입니다. 옥판 중에서 40개는 8개의 세트가 되는데 6개의 세트는 용문양과 구름문양을 조각하였습니다. 다른 두 세트는 용문양과 구름문양 외에 쌍을 이루는 봉황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이것은 아마도 옥궤 표면에 붙여 장식하였던 장식판이었을 것입니다. 나머지로 10개의 길고 짧은 장식판과 2개의 각각 다섯 개의 홈이 패인「옥검(玉檢)」이 있습니다. 선례를 마친 후 황제는 옥책을 옥궤 안에 넣고 다시 금을 입힌 줄로 다섯 바퀴를 둘러싸는데 매 바퀴마다 옥검 중의 홈에 맞춰지고 마지막으로 금니로 줄의 끝부분을 봉하고 「수명보(受命寶)」즉 인장으로 이것을 봉인합니다. 잘 밀봉한 옥궤를 큰 네모난 돌을 파서 만든 그 안에 넣고 마지막으로 오색 흙으로 돌덩이를 제사를 지낸 곳에 묻었습니다.
《송사(宋史)》〈지(志)‧예(禮)‧길례(吉禮)〉、《송회요(宋會要)》〈예이십이(禮二十二)〉등의 자료로 볼 때 송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에, 당 현종(玄宗)의 〈선지옥책(禪地玉冊)〉과 옥벽(玉璧)이 출토되었는데 때문에 송 태종은 봉선(封禪)* 전례를 거행하고자 옥책을 만들었으나 궁전에 불이나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송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1008) 당나라의 옥책을 원래 장소에 다시 묻으라고 명령을 하고 또 원래 장소 위에 단을 쌓고 선례를 거행하였는데 사용된 옥책은 이전 왕대에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원하는 글귀를 세기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1931년 마홍규(馬鴻逵)장군의 부대가 호리산 위에서 폭파해버린 탑의 기단을 정리할 때 오색흙 아래 묻힌 송대 옥책과 당대 옥책을 발견하였습니다. 훗날 마홍규 장군은 두 개의 옥책을 미국으로 가지고 가 여러 해 두고 있다가 1971년 마홍규 장군의 부인이 장군의 유언에 따라 이 두 귀중한 옥책을 타이완으로 가지고 돌아왔고 장개석 전 총통께서 본원에서 소장하도록 넘겨주셨습니다. 「백성의 뜻」으로 귀의하는 「하늘」은 바로 인간인 제왕의 보호자이며 감독자입니다. 「천지에 드리는 제사에 쓰인 옥책」은 바로 화하(華夏) 문화에서 「하늘을 경외하고 조상을 본받으며」「덕으로 하늘의 명을 받드는」 정치 철학의 가장 구체적인 상징입니다. 역대 제왕이 천지에 제사 드릴 때 썼던 옥책은 현재 당 현종과 송 진종의 선지(禪地) 옥책 두 개만이 전해져 내려오며 그 중 송대 옥책은 옥을 갈아 만들었고 완전한 한 벌의 옥편이 있습니다. 이것은 직접적인 역사 자료로 역사 기록의 빈 부분을 채워줄 수 있으며 또한 본원이 지난 100년간 소장하게 된 소장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국보입니다.
*중국의 제왕이 천지에 드리는 제사 의례

청중기  백옥 금여지(錦荔枝)
07 청중기 백옥 금여지(錦荔枝)

3F|전시실 306|하늘을 경외하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다-고궁박물원 소장 옥기 명품전

옥의 재질이 희고 깨끗하며 색채가 따뜻하고 윤기가 있습니다. 꼭지가 이어진 여주 세 개를 조각하여 껍질이 울퉁불퉁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기물은 청 궁정에서 「백옥 금여지」「금여지」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는 바로 여주입니다. 본디 자금성 건청궁(乾清宮) 안에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이 기물은 나무 받침대가 딸려 있는데 진열을 위한 것으로 사람들이 감상하는데 쓰였던 것입니다.

서주후기  송호(頌壺)
08 서주후기 송호(頌壺)

3F|전시실 305|고대 청동기의 빛나는 광채-고궁박물원 소장 청동기 명품전

이 기물은 중요한 때에 사용되었던 술주전자입니다. 전체 기물의 크기가 매우 크며 문양장식이 층층이 분포되어 있고 화려하며 또 생동감이 넘칩니다. 주전자의 뚜껑과 기물의 몸통에 똑 같은 152자의 명문이 있는데 주왕이 송(頌)을 책봉하는 의식을 기록하고 있으며 문체가 우아하며 문장이 수려합니다. 명문의 내용은 책봉을 명령하는 의식의 진행 세부사항을 완전하게 기록하고 의식의 시간, 장소와 관원들을 이끄는 순서를 먼저 명확하게 밝히고 다시 주왕의 송에 대한 업무임명과 수레와 옷의 하사에 대해 기술하여 서주 후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실증하고 보충하고 있습니다.

서주 후기  산반(散盤)
09 서주 후기 산반(散盤)

3F|전시실 305|고대 청동기의 빛나는 광채-고궁박물원 소장 청동기 명품전

이 기물은 넓고 얕은 접시에 높고 둥근 굽과 한 쌍의 귀가 달려 있으며 긴 꼬리의 기룡문(夔龍紋)이 접시의 배부분 외벽을 감싸고 있는데 우아하고 중후하여 접시 바탕위에 있는 350자의 명문과 서로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명문 내용은 열(夨)나라가 산(散)나라를 침범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땅을 할양하여 잘못을 갚음하도록 한다는 것을 적고 있는데 양도하는 토지의 범위와 측량에 참여한 관원의 직무상 칭호까지 상세히 기록하였습니다. 서주시기의 산나라와 열나라는 친밀하고 우호적인 사이일 때는 혼인 관계까지 있었습니다. 산나라는 열나라의 침범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고 배상을 획득하였는데 이에 기물을 주조하여 상세하게 기재하고 공덕을 찬양하며 모든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서주후기  종주종(宗周鐘)
10 서주후기 종주종(宗周鐘)

3F|전시실 305|고대 청동기의 빛나는 광채-고궁박물원 소장 청동기 명품전

기와 형태의 둥글 납작한 모양의 용종(甬鐘)으로 둥근 원호 모양의 입구에 양쪽으로 각각 18개의 돌기가 있습니다. 종의 꼭대기 부분은 구름문양으로 장식되어 있고, 중간 부분은 비스듬한 대각선의 구도로 S자형의 기룡문(夔龍紋)이 장식되어 있으며 종의 추가 부딪히는 부분 정가운데에는 좌우 대칭으로 용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띠와 추가 부딪히는 부분에 명문이 111자가 있습니다. 서주 후기에는 정치적 상황이 심각하였는데 서북지역에서 북방 오랑캐가 위협을 하고 남쪽 땅의 나라들은 기회를 엿보아 움직이는 내우외환의 상황이었습니다. 이 기물의 제작과 명문의 내용은 격동하는 정세에 맞서는 주나라 왕의 사직의 안녕을 기원하고 나라가 영구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웅장한 이상과 포부를 나타냅니다.

서주후기  모공정(毛公鼎)
11 서주후기 모공정(毛公鼎)

3F|전시실 305|고대 청동기의 빛나는 광채-고궁박물원 소장 청동기 명품전

모공정은 기물의 배 부분 내벽에 새겨진 명문으로 국가의 중요한 보물이 되었습니다. 명문은 전부 500자의 길이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긴 청동기 상의 명문입니다. 명문의 내용은 서주 「선왕(宣王)이 중흥을 이룬」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명문의 앞쪽은 선왕의 모공에 대한 타이름의 말들로, 글 중에 선왕이 즉위한 초기에 주문왕(周文王)과 무왕(武王)이 어떻게 하늘의 뜻을 누리고 나라를 일으켰는지 회고하고 즉위한 후에 그가 계승한 하늘의 뜻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뒷부분에는 선왕이 모공에게 풍부하게 하사한 것에 대해 상세하게 기재하고 있습니다. 모공 역시 문장의 끝에 선왕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아울러 이 정(鼎)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명문은 예스럽고 우아하며 심오한 문체로 선왕의 모공에 대한 간곡한 타이름과 간절한 기대, 책임이 중대한 것에 대한 심정을 전달하고 있으며 오늘날 읽어보아도 여전히 감동스럽습니다. 모공정의 기형은 지극히 소박합니다. 반구형의 몸체가 세개의 발과 발굽 위에 세워져 있고 기물의 입구 위에는 넓고 두터운 귀가 있습니다. 전체 그릇의 몸체는 반들거리고 문양이 없으며 몸체 입구 주변 아래에 간결한 중환문(重環紋)과 한 줄의 튀어나온 줄무늬가 둘러져 있습니다. 그 단정한 기형과 두터운 기벽 그리고 명문의 질박한 서예 양식은 선왕의 모공에 대한 깊은 신뢰와 호응을 하여 더욱 장중하고 엄숙하게 보입니다.

서주초기  쌍용 무늬 궤(簋)
12서주초기 쌍용 무늬 궤(簋)

3F|전시실 305|고대 청동기의 빛나는 광채-고궁박물원 소장 청동기 명품전

작은 입과 불룩한 배, 괴수 머리 모양이 달린 반쪽 고리모양의 귀에는 네모난 귀걸이가 달려있고 동그란 굽은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습니다. 쌍용 모양이 장식되어 있고 기물의 뚜껑에는 쌍을 이루는 기둥 모양의 뿔과 나선형의 뿔이 있으며 기물의 배부분에는 쌍용의 몸체가 휘감고 있고 기물의 뚜껑을 덮으면 용의 머리와 용의 몸이 완전한 모양을 이룹니다. 이 작품과 비슷한 도안 장식은 미국 프리어 미술관에 소장된 사람 얼굴 화(盉)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물의 안 바닥에는 「작보이(作寶彝)」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훗날 새겨진 것입니다.

진   26년 조서를 내린 타원형 계량 용기
13 진 26년 조서를 내린 타원형 계량 용기

3F|전시실 305|고대 청동기의 빛나는 광채-고궁박물원 소장 청동기 명품전

진시황은 당시 각국의 언어와 문자의 형태가 서로 다르고 수레의 바퀴가 다른 것에 대해 여러가지로 이를 통일시키는 행동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관에서 만든 도량형 청동기를 반포하고 제도를 명확하게 정하여 여섯 나라의 문자를 금지하고 진나라 문자로 만든 《창힐편(倉頡篇)》을 표준으로 하였습니다. 또한 진나라 관리를 교사로 하여 진나라 문자를 다시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진나라는 여섯 나라를 병합하고 진왕 정(政)을「시황제(始皇帝)」로 부르고 동시에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郡縣)을 세우고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였습니다. 도량형을 통일하는 조서를 반포하고 대량으로 제작된 도량형 표준 용기에 새겨 넣었는데 본원이 소장한 진나라의 계량 용기에는 바로 이 조서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명문의 대체적인 뜻은 진왕 정이 재위한 26년(기원전 221년)에 각국의 제후를 통일하고 백성은 안녕을 얻게 되었으며 존호를 「황제」라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때문에 승상 외장(隗狀)과 왕관(王綰)이 제정한 표준 도량형으로 서로 다르고 문제가 있는 것을 명확하게 하나로 만들라고 조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2F動線圖

북송  정요 백자 어린아이 모양 베게
14 북송 정요 백자 어린아이 모양 베게

2F|전시실 205|흙을 빚어 마법처럼 변화하다-고궁박물원 소장 도자기 명품전

백자 베개는 어린아이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린아이는 얼굴을 옆으로 하고 평상에 누워있는데 등부분이 베개가 되는 디자인이 기발합니다. 동시에 기물의 몸체에는 형태를 잘 만들고 장식하는 정요(定窯)의 뛰어난 기술이 사용되어 외형 뿐만 아니라 생동감 있게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익살스러우면서 귀여운 가운데 부유하고 귀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요는 송대 유명한 북쪽 지방의 가마로 가마터는 오늘날 허베이(河北) 취양(曲陽)현을 중심으로 하는데 그 지역의 옛이름이 정주(定州)였기 때문에 정요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작품들은 백자를 위주로 하며 모양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고 유약의 바탕이 곱고 윤이 나며 유약색은 흰색에 약간 노란 기운을 띄며 장식 기법에는 얕게 새기는 것, 깊이 파는 것, 문양을 찍는 것 등이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 모양 베개는 유약색이 온화하고 머리부분과 몸은 좌우의 틀로 붙이고 몸과 머리를 접합하여 다시 양각으로 얼굴을 표현했습니다. 특별한 점은 이것을 들어 본다면 기물 안에 진흙 덩어리가 하나 있는데 이동할 때에 가볍게 내벽을 치며 달랑달랑 소리가 나게 됩니다. 비슷한 어린아이 모양 베개는 세계에 알려진 것이 세 점 밖에 없는데 이 작품은 유색의 아름다움과 장식의 정교함에서 그 중 최고로 베개 바닥에는 청대 건륭황제의 시가 한 수 있으며 전해져 내려온 내력이 분명한 명실상부한 나라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송  여요 청자 연꽃 모양 데우는 사발
15 북송 여요 청자 연꽃 모양 데우는 사발

2F|전시실 205|흙을 빚어 마법처럼 변화하다-고궁박물원 소장 도자기 명품전

틀로 모양을 만들었는데 입구는 10개의 꽃잎 모양으로 되어 있고 그릇 벽은 곡선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릇의 몸체는 꽃 모양 입구에 따라서 고른 물결 모양을 보여줍니다. 그릇의 두께가 비교적 얇고 전체적으로 유약이 입혀져 있는데 빚음눈 자국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푸른 색 유약이 발라져 있는데 유약의 바탕이 고르고 매끈하며 푸른 중에 남색을 띄고 부분적으로는 분홍색 광택이 어렴풋이 나타납니다. 안과 밖으로 갈색의 무늬가 가득 퍼져 있으며 바닥은 둥글고 동그란 굽은 약간 높고 살짝 밖으로 뻗쳤습니다. 바닥에는 둘레를 따라 다섯개의 빚음눈이 배치되어 빚음눈 자국에는 회색의 태토가 드러나 있습니다. 허난(河南)성 바오펑(寶豐)현 청량사(清涼寺) 가마터에서 비슷한 표본이 출토되었는데 받침을 두고 굽는 것과 빚음눈을 두고 전체적으로 유약을 바르는 두 가지의 굽는 기술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데우는 사발과 주전자는 송나라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한 벌의 술그릇입니다. 요나라 무덤의 벽화와 국립고궁박물원이 소장한 <문회도(文會圖)>에 구체적으로 이러한 유형의 기물이 사용된 상황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요(汝窯) 외에 중국 경내 남방과 북방의 가마와 한국 고려청자에서도 역시 꽃모양으로 된 입구를 가진 데우는 사발의 예를 볼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그릇의 벽이 깊은 중국제품에 비해 고려청자 중에는 술주전자와 한 벌로 된 꽃모양 입구의 낮은 사발의 예가 있습니다. 이밖에 남송 지하 저장고에서 출토된 은그릇 제품을 통하여 모방을 했던 원형을 추적해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금은 그릇의 유행을 모방하여 다른 재질로 만들어졌던 시대적 맥락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북송 여요(汝窯) 청자 무늬가 없는 수선화 화분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
16 북송 여요(汝窯) 청자 무늬가 없는 수선화 화분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

2F|전시실 205|흙을 빚어 마법처럼 변화하다-고궁박물원 소장 도자기 명품전

타원형으로 된 화분은 입이 넓고 벽이 깊으며 평평한 바닥에 좁은 모서리가 튀어나와 있고 4개의 구름머리 모양의 다리가 있습니다. 둘레벽의 태토는 두께가 얇고 아래쪽 굽은 약간 두껍습니다. 전체적으로 파란 하늘색 유약이 가득한데 매우 균일하고 매끄럽습니다. 바닥에 유약이 쌓인 곳은 약간의 옅은 푸른 색을 띄고 있습니다. 입주위와 모서리의 유약이 얇게 발라진 곳은 옅은 분홍색을 띕니다. 다리 안쪽으로 빚음눈을 두고 구워서 바닥부분에 6개의 작은 빚음눈 자국이 있으며 미황색의 태토 색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릇 전체의 유색 표면이 깨끗하고 무늬가 없는데 이러한 종류가 전해지는 것은 매우 희소하며 온화하고 우아한 색채는 바로 송나라 사람들이 추구했던 비 온후 하늘이 갠 것과 같은 조용하고 맑은 미감입니다.

남송  길주요 흑유 잎사귀 무늬 사발
17 남송 길주요 흑유 잎사귀 무늬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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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중엽 이후 차를 마시는 예술을 중히 여겼던 문사들은 검은색의 차사발을 사용하여 백색의 찻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때문에 일시에 검은색 차사발을 제작하는 것이 푸젠(福建)성 건요(建窯)에서 남과 북의 큰 가마들로 퍼지게 되었는데 제각각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발의 벽은 비스듬하게 벌려져 삿갓모양을 하고 있으며 유약을 바른 후에 다시 칼로 다듬어 정리하여 굽의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작고 동그란 굽에 바닥은 얕고 오목하며 바닥 중심은 불룩합니다. 태토의 색깔은 미백색으로 외벽의 까맣게 빛나는 흑유 아래 뚜렷한 물레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릇 안의 검은 유약으로 발라져 있고 커다란 노란색 나뭇잎 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장인이 먼저 그릇 위에 옅은 황색 유약을 바르고나서 처리를 한 나뭇잎을 붙인 후 다시 철분이 많이 포함된 검은색 유약을 한 층 바르고 가마에 넣어 구워서 만든 것입니다. 사실적이면서 사람들이 음미할 수 있게 하는 시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길주요(吉州窯)의 옛 방법을 따라 구워 제작하는 실험에 의하면 뽕나무잎에는 아연, 철, 구리, 망간, 칼슘과 같은 소량의 원소들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뽕나무잎만이 나뭇잎 문양 잔을 구워 낼 수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쟝시(江西) 길주요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기법입니다. 길주요는 오대(五代)에서 원(元)나라 때까지 번성하였는데 각종 색채의 유약을 사용하고 그려서 장식하는 것 외에도 특히 유약에 함유된 철분의 양의 차이를 이용하여 문양 사이의 색채 대비를 통한 미감을 표현하였고 자른 종이, 나뭇잎, 대모(玳瑁) 반점 등과 같은 흥미로운 장식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그릇 안에 매화가지와 초승달을 금은으로 붙이거나 그려 넣었던 것 같은데 금은색이 떨어져 나가 빛을 비춰볼 때만 빠르게 붓질해 그린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화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매화 가지와 초승달의 도안은 남송에서 원대까지 길주요의 작품에 자주 보이는 것입니다.

명 성화  투채 닭이 그려진 자기 잔
18 명 성화 투채 닭이 그려진 자기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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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 후기 소장가들이 자기를 감상할 때 선덕(宣德) 시기의 청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그 다음으로 성화(成化)시기 가마의 오채(五彩)를 추앙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오채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투채(鬥彩) 자기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본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성화 투채 자기 중에서 잔의 장식 문양 많은 것으로는 포도 무늬 잔, 어린아이 놀이 잔, 고결한 선비 잔, 꽃과 새 무늬 가 있는 다리가 높은 잔 그리고 오랫동안 명성을 떨친 닭이 그려진 도자기 잔이 있습니다. 명말청초 정철(程哲)이 《용차여설(蓉槎蠡說)》에서 닭이 그려진 투채 자기 잔을 주목을 받은 한 종류로 특별히 지적하고 있으며 명나라 신종(神宗) 때는 이미 몸값이 「한쌍에 10만 전」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작은 잔은 입구가 넓고 벽이 낮으며 바닥은 평평하고 짧고 동그란 굽이 있습니다. 외벽에는 수탉과 암탉이 3마리의 병아리를 데리고 있는 장면 두 폭이 그려져 있는데 월계화와 난이 있는 덤불로 화면이 둘로 분리되고 입주변과 아래 둘레에 파란 선이 세 개 그려져 있습니다. 안쪽은 순백색으로 소박하고 문양이 없습니다. 바닥에는 「대명성화년제(大明成化年製)」라고 청화로 써진 해서체의 관식(款識)이 있습니다. 경덕진(景德鎮) 주산(珠山)의 성화 관요 유적에서 코발트 안료로 한 가지 색으로만 된 닭이 그려진 청화 자기 잔의 반제품이 출토되었는데 전해지는 작품과 비교를 해보면 「투채」자기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남색 점과 선에 각종 유약 위에 색을 바르는 안료를 채워 넣은 후 다시 가마에 넣어 구웠던 공정의 순서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닭이 그려진 투채 자기 잔이 전해 내려온 과정은 청 궁정《활계당(活計檔)》의 기록으로 볼 때 적어도 옹정(雍正) 시기까지로 추적해 볼 수 있으며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비단상자가 있는데 이것은 건륭(乾隆)황제가 칙령을 내려 정리하여 넣을 수 있도록 만든 수납함입니다.

청 옹정  법랑채 자기 버드나무와 제비 그림 사발
19 청 옹정 법랑채 자기 버드나무와 제비 그림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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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발은 입이 넓고 기벽이 둥글고 짧고 동그란 굽이 있으며 중자(中瓷)1234(유물번호)와 한 쌍을 이룹니다. 그릇 안은 무늬가 없으며 외벽의 한 면은 흔들리는 녹색 버드나무 가지와 점점이 붉은 살구꽃을 그렸습니다. 그 중 한쪽 사발에는 두 마리의 제비가 나뭇가지 끝에 서서 소곤거리는 것과 같고 다른 한쪽 사발에는 제비가 한 마리는 날아다니고 한 마리는 쉬면서 서로 호응하고 있습니다. 두 사발의 제비의 움직임과 버드나무, 살구꽃의 구도는 각각 모두 조금씩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외벽 한 쪽 면에는 먹으로 「옥으로 된 가위를 들고 꽃 사이를 거닐다 가벼운 옷을 입고 달이 뜰 때 돌아가네」라는 두 구절이 쓰여 있는데 이 시구절은 명나라 때 신시행(申時行)의〈응제제선(應制題扇)〉 칠언율시의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시 구절 앞에 「가리(佳麗)」 뒤에「사시(四時)」,「장춘(長春)」의 모두 세 개의 붉은 안료로 된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그릇 바닥에는 「옹정년제(雍正年製)」라고 두줄로 된 푸른 색 안료로 송체(宋體) 글자로 쓰여진 두 겹으로 된 네모 테두리가 있는 관식이 있습니다.

청 건륭  제청(霽青) 금으로 꾸민 헤엄치는 물고기가 그려진 안이 돌아가는 병
20 청 건륭 제청(霽青) 금으로 꾸민 헤엄치는 물고기가 그려진 안이 돌아가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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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겹으로 된 병으로 좁혀진 입구에 둘레는 말려 있고 목이 길고 어깨가 넓으며 배 부분에서 좁혀지고 낮고 둥근 굽이 있으며 기물의 어깨 부분에는 4개의 동그란 고리 모양의 귀가 달려 있습니다. 병의 배부분은 안과 밖 두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데 안쪽 층에는 옅은 푸른색의 호수와 같은 초록색 유약이 발라져 있어 호수의 물과 같은 배경을 표현하였고 그 안에 분채(粉彩)로 수초와 떨어진 꽃, 금붕어를 그렸습니다. 그릇 외부 바닥에는 호수와 같은 초록색 유약을 바르고 「대청건륭년제(大清乾隆年製)」라는 청화로 된 전서체 관식(款識)이 있습니다. 바깥쪽 병의 배부분에는 투각으로 4개의 창을 내어 사람들이 목부분을 잡고 돌리면 바깥쪽 병의 창을 통에 안쪽병에 그려진 수초와 물고기 무늬가 헤엄치며 노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마치 주마등과 같아 「속이 돌아가는 병」이라고 부릅니다.

1F動線圖

명  겹사법랑 오리모양 화로
21 명 겹사법랑 오리모양 화로

1F|전시실 106|집경조-고궁박물원 소장 진귀한 완상품 명품전

법랑기는 법랑유약을 금속 재질의 바탕에 도포하여 구워서 만드는 공예입니다. 겹사법랑(掐絲琺瑯)의 발명이 가장 오래되었는데 먼저 구리실로 틀을 만들고 각종 색깔의 유약안료를 채워 넣어 여러 번에 거쳐 구운 후 다시 갈아서 윤을 내고 도금을 하여 완성됩니다. 원나라때 서방으로부터 제작 기술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명대에 크게 발전하고 경태(景泰)연간에 창작이 최고조에 달하여 이러한 이유로 경태람(景泰藍)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청대 후기  상아를 조각해서 사람을 투각으로 새긴 여러 겹으로 된 공
22 청대 후기 상아를 조각해서 사람을 투각으로 새긴 여러 겹으로 된 공

1F|전시실 106|집경조-고궁박물원 소장 진귀한 완상품 명품전

투각으로 새긴 움직이는 여러 겹으로 된 상아공은 오어(鰲魚) 고리, 입체적으로 조각된 두 명의 사녀(仕女) 층, 투조된 여러 겹의 공, 그리고 두 명의 신선으로 된 늘어뜨리는 장식의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리와 사녀층과 여러 겹의 공 그리고 두명의 신선 사이에는 숫자가 다른 둥근 고리들로 연결되어 있고 공과 사녀층 사이에는 달리 작은 공모양이 나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투조된 여러 겹의 공은 모두 18개의 층으로 층들이 겹겹이 둘러싸여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바깥 층의 몸체에 부조로 산수, 누각, 인물을 조각하였고 안쪽 층은 도안 문양으로 투조로 장식하였습니다. 그 조각 기술과 양식으로 볼 때 이 투각으로 된 여러 겹의 상아공은 청대 중기 이후 광동(廣東) 상아 장인의 솜씨로 여겨집니다. 청대 남파(南派) 상아조각 공예로 만든 연결 고리, 투각으로 된 문양, 상아실로 엮은 것, 여러 겹의 상아공 등은 북경 궁정안에서 「신선의 솜씨」라고 불리웠습니다.

청 17세기에서 18세기  진자운이 만든 올리브나무 씨에 조각된 소나무 그늘에서 낚시하는 모양의 부채고리 장신구
23 청 17세기에서 18세기 진자운이 만든 올리브나무 씨에 조각된 소나무 그늘에서 낚시하는 모양의 부채고리 장신구

1F|전시실 106|집경조-고궁박물원 소장 진귀한 완상품 명품전

높이가 겨우 3센티밖에 안되는 올리브나무 씨 위에 파노라마식의 구도로 계곡 언덕의 소나무 그늘 아래 낚시배 두 척이 물가에 정박하고 낚시배를 탄 사람과 물가 기슭에 있는 사람이 음료를 마시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고부조와 투조 등 조각 기법을 잘 이용하여 화면의 주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물의 표정이 생동감이 넘치고 동감이 풍부하며 소나무와 낚시배 등의 세부 처리에 상당히 신경을 썼고 부벽준(斧劈皴) 기법으로 산과 돌의 결을 나타내고 가는 선을 음각하여 먼 산의 공간을 묘사하였습니다. 한쪽에 뚜껑이 있어서 여닫을 수 있는데 뚜껑 위에는 웅크리고 누워있는 작은 고양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대단히 정교하고 섬세하며 기교와 표현에서 대나무 조각처럼 차례가 분명하고 또 산수화처럼 깊은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위에 「경진(庚辰)년 초여름 음력 보름 전에, 진자운(陳子雲) 제작」이라고 관식이 새겨져 있습니다.

청  산호로 만든 괴성(魁星)이 있는 분재
24 청 산호로 만든 괴성(魁星)이 있는 분재

1F|전시실 106|집경조-고궁박물원 소장 진귀한 완상품 명품전

* 잠시 전시를 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을 보시면 화분 가운데에 식물이 아니라 모양이 특이한 조각상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청대 궁정에서 상당히 유행하였던 길상 분재 장식품으로 주홍색 산호를 교묘하게 조각하여 북두칠성을 높이 들고 있는 괴성을 만들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괴성은 원래 학식이 풍부한 선비였습니다 다만 생긴 것이 기괴하여 계속해서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있다가 화가 나서 물에 투신하였다고 합니다. 마침 물속에 있는 오어(鰲魚)가 그를 구하여 이때부터 북두칠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과거시험운과 벼슬길이 형통하는 것을 주관하는 민간에서 모시는 신이 되었습니다. 앞에 있는 이 작품은 온몸이 주홍색이고 머리에 뿔이 난 괴성을 두터운 눈썹과 튀어나온 눈에 이를 드러내고 입을 일그러뜨린 사나운 모습으로 상당히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습니다. 몸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띠가 둘러져 있고 손에는 북두칠성과 매화가지를 들고 한 발로 용머리를 한 물고기 위에 서있는데 비취옥으로 된 오어의 머리가 파도사이에 솟아올라 있습니다. 매화는 꽃의 우두머리로 장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괴성의 다른 한 다리는 뒤로 차올려 북두칠성에서 됫박 모양을 한 주성(主星)을 향하고 있는데 이러한 괴성의 자세는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운이 형통한다는 뜻의 괴성 외에도 그 주변은 각종 상서로운 상징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화분 네 면에 다섯 마리의 박쥐가 수(壽)자 도안을 에워싸고 있는데 행복과 장수, 오복이 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화분 안쪽에 태호석(太湖石) 위의 영지는 상서로움을 대표하며 괴성의 손 안에 있는 매화가지도 봄에 가장 먼저 피는 매화처럼 모두를 앞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작품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있는 조각과 정교한 상감 기법으로 금은과 각종 진귀한 보석을 조합하여 길상의 의미가 가득한 아름다운 장식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도 놀랍지 않습니까?

명대 가정  척홍으로 만든 구름과 용 무늬 작은 궤 다보격 나무상자 포함 109점
25 명대 가정 척홍으로 만든 구름과 용 무늬 작은 궤 다보격 나무상자 포함 109점

1F|전시실 106|집경조-고궁박물원 소장 진귀한 완상품 명품전

청대 궁정에서 사용된 명대 가정(嘉靖) 연간의 칠을 한 궤로 다보격(多寶格)으로 쓰였습니다. 궤의 몸체는 4개의 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마다 1,2,3,4개의 서랍이 있으며 서랍안에는 청나라 궁정에서 따로 만든 칸막이가 있는데 보관된 유물들은 주로 청대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내용물은 청대 묵 12점, 명대와 청대 작은 옥기 41점, 서예 소책자 3점, 청대 자기 6점, 서양 시계와 법랑 7점, 청대 작은 그림 두루마리와 화책 8점, 명대와 청대 칠기상자 6점, 청동기 3점 그리고 유리, 밀랍, 단향목 등의 문구, 도장, 연적, 문진 등 22점이 들어있으며 가정연간 척홍(剔紅)으로 만든 구름과 용 무늬 작은 궤를 포함하여 모두 109점입니다.

북위 태화 원년  석가모니불 좌상
26 북위 태화 원년 석가모니불 좌상

1F|전시실 101|慈悲與智慧—宗教雕塑藝術

석가모니불이 결가부좌를 하고 두 개의 층으로 된 대좌에 앉아서 오른손은 무위인(無畏印)을 하고 왼손으로는 옷자락을 쥐고 있습니다. 몸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승기지(僧祇支)를 입고 겉옷을 걸쳤는데 두 어깨의 옷문양이 화염처럼 밖으로 휘날리고 얼굴의 표정은 장엄하고 기세가 웅장합니다. 광배 안쪽 동그라미 안에 네 분의 부처와 두광 중의 세 분의 부처가 있어 함께 일곱 부처가 있는데 광배 바깥 테두리는 활활 타는 U자 모양 화염 문양으로 둘러싸여 있어 주존의 기세와 서로 어우러져 웅장하고 힘찬 기세를 더하고 있습니다. 크기는 비록 작지만 북위(北魏)의 황실에서(460년경) 만든 운강(雲罔) 제20굴의 주존과 양식적으로 가까운데 북위 태화(太和)시기 금동불상의 새로운 양식입니다. 주존상과 좌대는 함께 주조되어 만들어 졌고 광배는 따로 주조가 되었습니다. 청동으로 된 바탕 재질이 치밀하고 도금이 두터우며 바탕재질과 긴밀하게 부착되어 있고 금색은 노란색에 붉은빛을 띠고 만든 솜씨가 훌륭합니다. 두 개의 층으로 된 대좌의 위층은 수미좌(須彌座)로 위와 아래를 향한 연꽃잎이 있고 대좌 측면은 당초문(唐草文)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대좌 앞에 두 마리의 사자가 있는데 머리는 뒤를 향하고 몸을 돌리고 있는 자태가 위풍당당합니다. 아래층은 네모난 형태의 받침으로 파도모양으로 가운데가 뚫려 있고 양측에 모두 공양자가 있는데 위의 당초문은 사슬처럼 이어져 배열되어 있고 대좌의 조각이 훌륭합니다. 광배 뒷면의 배치는 질서정연한데 조각이 정교하고 모두 3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층 중앙에 탑이 하나 있는데 석가와 다보불(多寶佛)이 그 사이에 앉아 있고 탑 밖의 좌우 양측에는 문수보살이 여의(如意)를 들고 손에 주미(麈尾)를 든 유마(維摩)와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마힐경(維摩詰經)•문수문질품(文殊問疾品)》을 표현하였습니다.
가운데 층은 석가모니불이 녹야원(鹿野苑)에서 깨우침을 전하는 내용으로 양측에 각각 두 명의 승려가 꿇어앉아 있고 보살 협시가 있습니다. 아래층 중앙은 탄생한 부처가 한손가락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가락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있으며 좌측에 마야부인이 나무에 올라서 있고 태자가 그 오른쪽 옆구리에서 탄생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측에는 용왕이 부처를 씻기고 있으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이 양쪽 옆에 꿇어 앉아 있습니다. 아래층 가장 바깥쪽에는 두 개의 장방형의 네모 안에 제문이 쓰여 있는데 글자의 흔적이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광배는 내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구도의 배치가 질서정연하고 장면이 박진감이 넘치며 의심할 바 없는 5세기의 명품입니다. 대좌의 뒷면에는 명문이 있습니다︰태화 원년 9월10일/안시현 제양(堤陽)에서…/자신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어머니를 위해 석가모니불을 만들어/불법을 듣고, 또/집안 가족들의/ 크고 작은 현세의 안녕을 위하고, 죽은 사람이 좋은 곳에 가도록/ 모든 부처들에게 이르며, 바라는 바가 이렇게 이루어 지길 바라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주: 안시(安熹)현은 오늘날 허베이(河北)성 딩(定)현 부근) 본존상의 보존이 완전하고 대좌와 광배가 모두 남아 있으며 조각이 정밀하고 뛰어나며 기년이 분명하고 내용이 깊이가 있는 예술성과 역사성 그리고 종교성을 겸비한 세계에 현존하는 중요한 금동불상입니다.

최근 업그레이드 날짜:2024-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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